고라니 집

2022. 11. 5. 12:51돌밭의 뜰

 텃밭 북쪽으로는 송학산을 둘러친 튼튼한 철조망이 있다.

멧돼지가 내려와서 전염병이 번지지 못하게 제천시에서 설치한 이후로 멧돼지의 피해는 완전히 없어졌다.

그에 따라 고라니의 출현도 한동안 없더니 올해부턴 텃밭작물을 이따금 잘라먹어 텃밭주인의 화를 돋우기도 한다.

철조망설치 후엔 고라니가 송학산에서 내려오는 게 아니니 아래 쪽 야산이나 풀밭에서 올라오는 것이 분명하다.

 들깨밭과 매실밭 사이에 오십여 평의 풀밭이 있다.

들깨밭으로 늘려갈 공간이지만 게으름으로 그대로 두 해를 놔두었더니 억새밭이 되었다.

오늘 아침에 밭을 돌아다니다 억새풀들이 눕혀진 곳을 보니 바로 고라니 집이 하나 보인다.

고라니 집은 아주 엉성해서 은폐장소로의 역할만하면 되고, 흙 위의 풀들을 둥글게 눕히면 그만이다.

방어는 풀들의 은폐로 족하고 여차하면 뛰쳐나가 도망가기에 편하면 되니 고리니 나름대로 새끼들을 잠깐 돌보고 살기에 편하면 그만인 것이다.

비가 내리면 고스란히 비를 맞는 집이고, 고라니를 쫓아내면 으슥한 풀밭으로 가서 바로 둥지를 틀면 되니 고라니는 집 걱정할 일이 없다.

사진 중앙 윗쪽에 검은 부분이 고라니 집

 

매실밭의 풀들을 잘라주지 않으면 주변에서 사는 고라니들이 텃밭으로 자주 찾아온다.

예초기를 가지고 매실밭 제초를 할 때에 어쩌다가 고라니 두세 마리가 도망가는 걸 보기도 하고, 집 같지도 않은 고라니 집을 두세 개를 흔적 없이 밀어버리기도 한다.

미안한 마음도 들지만 어찌하랴.

자연생태를 유지하는 멋대로의 웃기는 농사를 지향한다고 하지만 작물을 마구 해치는 고라니를 텃밭에서 기를 수는 없으니 어쩌랴.

 

겨울이 되어 수도가 얼면 어쩔 수없이 텃밭에서 철수를 한다.

철수하기 전에 할일이 매실밭에 허리춤까지 자라난 잡초를 자르는 일이다.

예초기로 자르기도 편하고, 잘려진 풀들이 겨우내 눈에 눌려 매실을 위한 거름으로 변해가는 전단계가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른 봄에 매실 전정작업을 하기 좋으니 가을철 텃밭관리의 마지막 단계인 것이다.

텃밭에서 쫓겨난 고라니는 어디로 가서 둥지를 틀까?

좀 있다가 예초기로 잘려질 고라니 집을 바라보며 어린아이처럼 공상해본다.

ㅎ ㅎ 그 걸 왜 걱정하나?

그게 고라니의 일생인 것을!

쫓겨 다니며 살아도 풀밭 찾아 뒹굴며 작은 풀 침대 만들면 그게 바로 집이니 세간살이 옮겨가며 살집 찾아 고생하며 살았던 나의 인생보다는 맘 편한 고라니의 생이려니!

(`22.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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