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종주기(1)

2009. 6. 5. 00:45나들이

 지리산은 제일 좋아하는 산이다.

멀리 있어 더욱 그립고 언제나 가고 싶은 산이다.

친구와 둘이 종주를 했다.

환갑 전 세 번 종주했으면 했는데 네 번째 종주를 했다. 다섯 번을 채워야 욕심이 사라질까?


 종주 시점을 화엄사로 했으면 했는데 친구가 반대다.

종주 종점을 대원사로 했으면 했는데 그 또한 반대다.

대피소예약과 차표를 친구가 맡았으니 그저 따르기만 하면 된다.

그래 좋다! 나름대로 히든카드를 가지고 내심 계획을 세웠다.

그건 친구를 살살 꼬이고 그러고도 안 되면 나 혼자 반야봉을 오르고, 세석에서 한신계곡을 내려가며 오르며 폭포를 즐기는 거다.


 6월1일 11시40분 구례구역에 도착.

역전에 있는 밥집에서 제첩해장국을 먹으며 동태를 살핀다.

식당 문을 나가 둘러보니 택시기사가 껄껄 웃으며 다가온다. 역에서 내리자마자 인사하며 다가오던 택시기사이다.

“얼마?”, “\35,000”, “ 흠?”, “\25,000”,  “피~ \20,000” “에구야~조옷소!”

시골택시는 메타기를 돌리지 않는다. 부르는 게 값이다.

합승을 할 때 동네사람이 천 원 내면 타지인은 이천 원 낸다.

택시기사의 구수한 입담에 오천 원 더 주었다.


 성삼재에서 오후 12시40분 산행시작.

 

* 노고단대피소의 표시목

* 토종 노란민들레 

 

편한 찻길로 워밍업을 하면서 노고단대피소에서 식수를 챙기며 잠시 휴식을 한다.

노고단 돌탑을 만져보면서 현장답사 하느라 노고단 정상을 찾았다.

 

* 노고단돌탑을 오랜만에 가서 보았다

 

 

 

 노고단을 벗어나면서부터 등산로는 산길다워진다.

신갈나무와 철쭉에 덮이고 조릿대가 두툼하게 도열한 호젓한 산길을 오르내리면 점차 선계에 빠져든 것도 모르며 앞으로 나아간다.

 

  

눈에 보이는 게 푸르고 산뜻함이요, 가슴에 들어오는 게 맑고 신선함이라!


 친구와는 이십여 년 전에 어설픈 지리산 종주를 한 번 하고 이 번에 뜻이 맞아 같이 즐기기로 하였다.

종주산행 전에 체력관리와 준비상태를 철저히 하는 성품을 익히 알기로 전혀 걱정할 부분이 없기에 나 홀로 산행하는 거나 다름이 없다.

친구는 오랜만의 종주산행에 차질을 빚을까보아 등산장비를 철저하게 준비하였다.

오스프리 배낭, 쉘러 바지, 기능성 내의, 집티, 쌍 스틱, 고아텍스 모자, 최고급 물주머니, 실리콘 풋 케어( 엄지발가락 쪽이 튀어나온 사람들에게 유용하다) 등 만족스럽게 그리고 충분하게 하느라고 백수 주제에 큰 돈을 썼다. 친구의 영부인이 화는 내지 않았겠지만 친구가 눈치께나 살피며 준비를 한 것이다.

그런데 한 가지를 뺀 것이다.

등산화가 늙어 바닥이 닳아 친구는 하산 길에 세 번이나 미끄러져 혼쭐이 났다.


 노루목에서 친구의 눈치를 살핀다.

도대체 들어주질 않으니 할 수 없다. 오가며 만나는 이 없으니 나 홀로 각자 등산이다. 

 

* 노루목에서 휴식을 취하는 친구

 

 

반야봉이 뭣이기에 노루목에만 오면 갈등을 빚는지!

주능선에서 벗어나 고달픈 돌길을 오르내리며 뭣을 얻는다고 되돌아올 길을 나서는 것일까?

반야봉에 부처가 정좌하고 설법을 한단 말인가?

철쭉에 둘러싸인 돌 봉오리를 보살들이 합장하며 경을 읽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보리수 없는 부처자리에 앉아 사방을 둘러보면 깨달음을 얻는단 말인가?

지난번 종주 때처럼 내심 갈등을 잠재우고 한 시간 넘는 고난의 길로 접어든다.

 

* 반야봉 오르는 길

 

지름길로 질러가는 요령을 피하고자 배낭을 이백여 미터 가다가 길옆에 모셔두고 물 한 모금 마신 뒤에 카메라만 들고 반야봉을 향한다.

헉헉거리는 호흡을 이따금 달래면서 지나온 노고단을 바라본다.

 

* 저기가 노고단 

  

아직도 예쁘기 그지없는 철쭉이 군데군데 꽃을 피우면서 불심을 지펴가며 합장하는 나그네를 밝게 맞이한다.

 

* 열흘 뒤에도 피어있을 것이다 

 

 

 아무도 없는 반야봉!

아니, 때 묻은 누군가가 있으면 반야봉이 아닌 반야봉!

한 동안 바람 부는 반야봉을 거닐며 서며 눈을 뜨고 눈을 감고.........

그래! 나는 사람이고 사람이 사는 인생의 길로 다시 돌아가는 거야!

이 자리에 머물며 부처가 되는 것은 찰나의 순간으로 족한 것이리라!

찰나를 영겁으로 만드는 지혜는 죽고 나서 터득하는 것이리라!

찰나의 깨달음이라도 맛을 본 중생은 영원한 극락에 있는 것과 다를 바 없으리라!

 

* 구상나무는 날고싶다 

 

 

 십여 분의 짧은 행복한 순간에서 깨어나니 온몸이 떨고 있다.

멀리 아득하게 서녘을 지키는 노고단을 다시 한 번 눈에 넣고 반야봉에 엎드린다.

 

 다시 내려와 배낭을 메고 안개에 휩싸인 노루목으로 돌아왔다.

삼도봉을 지나 화개재에서 잠시 몸을 추스르고 토끼봉을 오르기 시작한다.

시간 반을 앞서가는 친구와의 간격을 줄인다는 것이 어리석음이라는 것을 알고는  이내 반야봉 능선 너머로 사라지는 붉은 해를 느긋하게 즐겨보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나 낙조의 아름다움에 취하는 자리가 없다. 토끼봉 정상이라면 몰라도 이미 지나온 곳을 다시 갈 수 없고, 아무리 둘러봐도 길을 벗어나서 내일로 넘어가는 붉은 해를 제대로 볼 수가 없다.

 

* 반야낙조는 아니지만... 그래도, 구름 걷친 산 쪽으로 해가 넘어간다

* 안개 속에서 까마귀는 까악 까악 울어대고 

* 일몰 후의 아늑한 풍경

 

안타까운 마음에 허둥대다가 산행의 리듬을 잃었다.

일몰 후에 안개와 함께 어둠이 깔린 숲길에서 배낭을 내려놓고 잠시 호흡을 가다듬고는 간식을 먹고 물을 마시고 랜턴을 꺼내어 머리에 고정시킨다.

바람과 함께 밀려드는 안개와 어둠으로 불빛이 열 걸음 앞도 비추질 못한다.

명암이 엇갈리는 뿌연 밝음과 짙은 어둠 속에서 바람소리와 조릿대 울부짖는 소리에 외로운 산꾼은 평상심을 잃고 몸을 떨었다.

아무리 앞으로 씩씩하게 발걸음을 내 디뎌도, 아무리 용을 쓰고 돌길을 올라가도 도무지 앞으로 가는 것 같지가 않다.

반야의 지혜를 떠난 지 얼마나 되었다고 스산함을 느끼느냐고 한 소리 토한 다음 호흡을 가다듬고 명선봉으로 향한다.

명선봉 지나 조심스레 내려가니 대피소의 불빛이 아득하게 반짝인다.

좀 지나 친구의 부름이 귀에 들어온다. 어둠 속에서 반작이는  랜턴을 보고 부르는 소리다. “워~어” 대답과 함께 이내 친구를 찾아낸다.

반갑다. 무척 반갑다. 오후 8시40분. 예상시간보다 반시간 더 걸었다.

친구는 그새 위스키 몇 모금 했나보다. 버너와 코펠이 없으니 밥도 못 먹고, 그리고 성질 나빠 고생하는 놈 걱정도 되고, 밖에 나와 기다리니 춥기도 하고......

지리산 귀신에 잠시 홀려 한 시간 넘게 안개 덮인 어둠 속을 헤맨 후의 위스키 몇 모금은 가히 환상적이었다.

그리고 연하천대피소의 침상은 바로 극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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