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물구두 해프닝

2009. 11. 23. 20:19마음, 그리고 생각

 백수로 6년을 지내다가 모처럼 봉급을 받으니 때때로 옛사람들도 생각이 난다.

며칠 전에는 전 직장 상사인 모 은행장과 점심식사를 하였다.

 옛날 부하인 내가 취직을 하여 점심을 내겠다고 하였는데도 그분께서 굳이 내시겠다고 하였고, 그분은 모 호텔의 와인창고가 들어있는 음식점에 예약을 하였다고 연락을 주었다.

 점심 먹을 식당이 워낙 비싼 곳이라 그냥 가기가 거시기하여 호텔에 붙어있는 백화점에서 넥타이를 선물로 하나 샀다.


 넥타이를 사가지고 오는데 오른쪽 구두의 감촉이 이상하다.

살펴보니 뒤쪽굽이 삼분의 일 쯤 떨어져 너덜거린다.

 그때부터 내가 백화점의 깨끗하게 반짝이는 바닥을 밟을 때마다 굽이 삭아서 떨어지는 까만 가루들이 내 오른발에서 톡톡 털려 나온다.

내 뒤에 오는 사람을 보니 내 오른발을 보면서 온다. 모른 척 하면서 가려고 해도 그 사람이 이상하게 생각하며 관찰을 하는 것 같아 걸음을 빨리 하니 가루가 더 많이 나오게 되고.

급기야 뒷사람이 나를 지나쳐갈 때를 기다려서 걸어보지만 그걸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이런 제길! 이번에는 앞에서 오는 이가 내 뒤에 그려진 궤적을 보고 나를 힐끗거린다.

점잖은 체면에 말이 아니다.ㅜㅜ


 오랜만에 만난 상사와 즐거운 이야기를 나누며 하는 식사를 끝내고 호텔로비로 같이 가려다가 오른쪽 구두에서 떨어지는 까만 고무가루를 보여주기 거시기하여 볼 일 있다며 인사를 하고는 다시 백화점 쪽으로 향하였다.

서로 180도로 돌아가는 바람에 그분이 까만 고무가루를 보지 못하였다.ㅋㅋ

 다시 백화점으로 가서 구두 파는 층으로 갔는데 100여 미터는 족히 헤매고 다녔다. 하얗게 반짝이는 백화점의 고급타일바닥에 색상대비가 무지하게 잘되는 새까만 고무가루를 톡톡거리면서 흘리고 가는 모양이 얼마나 우스울까?

내가 생각해도 엄청 배꼽을 잡으며 웃을 일이다!


 에라! 모르겠다.

이젠 얼굴이 두꺼워질 차례다.

일부러 더 양반스타일로 걸어본다.

그리고 일부러 오른발에 힘을 주어 틀어본다.

급기야 뒤 굽이 떨어지기 일보직전!

 기세 좋게 구둣가게 의자에 앉아 내 발 크기에 맞는 구두 몇 가지를 청해본다.

디자인이 맘에 썩 들지 않았지만 고무가루 흘린 죄로 다른 구둣가게로 또 다시 까만 고무가루를 흘리면서 갈 배짱은 없다.


 한 달 전에는 예전에 입던 양복을 정리를 하였었다.

30여년을 지나도 체형이 거의 그대로이기에 15년이 지난 양복이 몇 벌이나 되었고 보기에도 멀쩡한 것이 많았었다.

그러나 세 벌 중 두 벌은 골라내어 버렸다.

아깝지만 양복의 실밥이나 천이 터져 언제 궁둥이나 겨드랑이가 봉변을 당할 수도 있기에 오래된 고물을 정리한 것이다.

그때에 구두도 같이 검사하고 정리하여야 했었는데 그러질 못해 호텔과 백화점의 청소부를 고달프게 한 것이다.

 오늘 신발장을 뒤져 고물 구두를 다시 꺼내본다.

해프닝을 벌일 수 있는 후보자를 몇 놈 잡아내었다.

 근무복이 양복이니 할 수 없이 구두 두어 켤레 더 사야겠다.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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