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12. 14. 23:36ㆍ마음, 그리고 생각
오랜만에 여유를 느껴본다.
할 일이 없어서 시간이 나는 것이 아니라 바쁘거나 집중하여야 할 일들을 의식적으로 치우고 잠시 멍하게 하루를 보내고 싶어서 늘어져본다.
일요일은 가능한 한 아무 일도 하지 않고 하루를 온전히 놀고 싶다.
어떤 때는 성당에 가는 것도 땡땡이 치고 빈둥거려 보면서 진짜 게으른 즐거움을 맛보기도 한다.
어떤 생활에서의 의무감 같은 것에서 이따금 벗어나 따스한 봄날에 잠시 나른하게 오수를 즐기는 기분 같은 것을 맛보면서 사는 것은 다음 날부터 시작하는 긴장과 피로를 완화해 주는 데에도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오늘은 늘어져 보았다.
그러나 늘어지는 것도 몇 시간 계속할 수가 없다.
좀이 쑤시니 가만히 있을 수가 없고, 그러니 무언가 해야 직성이 풀릴 것이다.
집안을 두리번거리다가 엿기름, 고춧가루, 메주가루, 찹쌀가루, 매실발효액 등 고추장재료를 담은 보따리를 보았다.
텃밭에서 나는 고추를 말려 만든 진짜태양초 가루가 주인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는지 꽤나 오래다.
아내는 가게에 나가 없고, 집엔 나 혼자이다.
작업하기 딱 좋은 환경이니 그대로 흘려보낼 시간이 없다.
엿기름을 물에 불려 놓고 비벼대니 뽀얀 국물이 양동이에 가득하다.
두어 시간을 엿기름하고 놀다가 우려낸 국물을 깨끗하게 걸러내어 양동이에 담아 화덕에 올려놓는다.
엿기름 국물이 뜨거워지기 전에 찹쌀가루와 우리밀가루를 넣고 양동이 바닥에 눌어붙지 않으면서 고르게 풀어지도록 나무주걱으로 계속하여 하염없이 휘젓는다.
국물이 끓어서 좀 줄고, 풀같이 끈적임이 느껴질 때에 화덕에서 내려 식힌다.
그리고는 메주가루를 넣고 비비고, 섞고, 고춧가루를 넣고 비비고, 섞는다.
그리고 준비해 놓았던 소금물과 매실효소 원액을 수시로 알맞게 넣고 고춧가루와 메주가루가 골고루 잘 섞이도록 팔운동을 한다.
이마에 땀방울이 맺히고 어깨가 뻐근해지니 범벅의 색깔이 빨갛고 곱게 제대로 나타난다.
범벅의 물기, 간, 색, 냄새 등이 제대로 되었다.
맛도 그야말로 혀를 죽여준다. 만든 이의 입맛에 딱 맞아떨어진다.
유기농 고추장 15킬로그램을 완성하니 하루가 다 지났다.
고추장 담은 항아리 두 개와 네 개의 고추장통을 바라보니 콧노래가 절로 나온다.
취미로 하는 일은 일이 아니고 노는 것과 같은 것일 게다.
생업이나 일상적인 일에서 벗어나 별개의 즐거움을 위하여 노는 것은 온몸이 지치고 피곤하여도 마음 뿌듯하고 머리가 상쾌하다.
아내가 만들어야할 고추장을 남편이 대신 담그는 것도 색다른 재미이다.
가사 일이라 하여도 남자가 못할 바 아니고, 그리고 남자가 요리를 한다하여도 잘못된 일이 아니다.
더구나 요리에 재미를 느끼고 입이 즐거우면 좋은 일임에 틀림없을 것이고, 그러한 요리는 세상의 남편들에게 권장할 만한 일일 터이다.
휴일을 재미있게 지내고나니 심신이 상쾌하다.
오랫동안 아팠던 목의 근육도 상당히 많이 풀어진 듯하다.
오늘이 재미있고 보람이 있으면 내일 또한 희망적이고 행복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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