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느리의 항아리

2007. 11. 3. 11:20마음, 그리고 생각

 

 열흘이 넘게 아파트 출입구 옆쪽에 항아리가 놓여있다.

오늘 아침에도 변함없이 그대로 있어 뚜껑을 열어보았다.

소금이 좀 남아 있고 바닥에는 간수가 고여 있다. 그리고 작은 항아리뚜껑 한 개와 장아찌 담글 때 쓰는 돌멩이가 두 개 들어있다.

아파트 경비에게 물어보니 가져가는 사람이 없으면 항아리를 내놓은 아줌마에게 쓰레기처리비용을 받아서 버리겠다고 한다.

 와~! 이게 웬 땡이냐!

허리춤을 넘는 멋진 항아리가 아마 십여 만원은 넘을 텐데 공짜로 얻다니 말이다.

지난 번 제천시장에서 텃밭에서 들깻잎 절임용으로 쓸 조그만 항아리를 샀는데 삼만 원을 주었다. 그 때에 옛날생각에 뒷간에 항아리를 묻어볼까 하였으나 너무나 비싸 엄두를 못 내었는데 멀쩡한 항아리를 공으로 얻다니!

 

 살림꾼인 시어머니는 항아리를 여러 개 모시며 살았다.

된장, 간장, 고추장, 김장용 항아리 등 크고 작은 항아리를 최소한 열 개는 끼고 극진하게 모시며 살았다.

그런데 아파트란 콘크리트 상자에 살면서 항아리는 애물단지가 되었다.

냉장고와 김치냉장고가 주방에 크게 자리를 잡고 나니 항아리는 아파트의 좁은 테라스에서 먼지를 뒤집어쓰고 지낸다.

또한 각종의 인스턴트식품으로 식사를 해결하는 고상하고 현명한 며느리가 집안의 실권을 잡게 되니 시어머니는 마음 놓고 등 기댈 벽도 제대로 없다. 아들집에서 양로원으로 쫓겨나지 않는 것만으로도 다행이다.

눈이 어두워지고 입맛과 손맛이 둔해지는 시어머니가 장 담그기를 제대로 하기가 여간 어려울까? 설혹 장 담그기를 제대로 하여 전통의 장맛을 기막히게 살려놓았다 하더라도 젊은 아들과 며느리와 손자새끼들이 외면을 하니 맛있는 장들은 개밥에 도토리 신세가 되고 만다. 장 담긴 항아리를 끼고 살아봐야 똑똑하고 기세 좋은 며느리에게 구박받기 일쑤다.

그래서 아파트에서 항아리 데리고 사는 인간들이 점차 사라져가는 세상이 되는 것이다.

숨 쉬는 항아리? 참으로 웃기는 말이다. 손톱에 매니큐어 색색으로 바꿔가며 한 번에 십여 만원 넘게 주어가며 마사지 받으며 사는 여자들이 냄새나는 숨쉬는 항아리를 볼품없이 옆에 끼고 보살피며 살 수가 있을까?


 오늘 항아리로 횡재를 하여 기분이 좋았다.

먼지를 뒤집어쓴 항아리를 씻어내니 참으로 잘 생겼다. 게다가 투박한 음각무늬와 꽃그림도 마음에 든다. 이런 항아리는 요새 눈을 씻고 찾아보아도 없다. 그러니 살 수도 없다.

인분통으로 쓸 마음을 바꾸어 장 담그는 항아리의 본래 용도로 써야겠다.


 항아리를 깨끗하게 닦고 나니 인생을 생각하게 된다.

나의 아내는 최소한 항아리 열 개는 끼고 살았으면 좋겠다.

나의 아내의 며느리는 시어머니가 끼고 살던 항아리를 버리지 않았으면 좋겠다.

나와 나의 아내는 시골에서 많은 항아리를 예쁘게 진열하고 윤기 나고 생기 있는 장독대를 간수하며 맛난 냄새를 풍기면서 살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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