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5. 28. 14:17ㆍ마음, 그리고 생각
최근 몇 년 동안은 커피 맛을 음미하면서 커피를 내려서 먹는 아주 작은 호사를 종종 부리며 살고 있다.
원래 한국녹차를 즐겨 마시는 게 일상이고, 손님하고 커피를 마실 때나 어쩔 수 없이 커피를 마셨지만 요즘에는 집에서 스스로 하루 두어 잔은 직접 원두를 갈아 내려 마신다.
내가 우리 집의 바리스타인 셈이다.
아내는 당연하게 나를 부려먹는다.
아내는 자기가 만드는 커피의 맛이 없다며 내 손맛을 칭찬하니 어쩔 수 없이 응하게 된다.
같은 재료를 가지고 음식 만드는 사람에 따라 맛이 달라지며, 맛이 없기도 하고 없기도 한다.
커피 또한 마찬가지이다. 하다못해 맥심모카골드 봉지커피를 타도, 타는 사람의 정성과 기술에 따라 매우 맛없게 타는 이가 타주는 커피는 구역질이 나기도 하며, 아주 잘 타는 이가 타주는 건 아주 맛이 감칠 맛나게 좋은 경우도 있지 않은가?
내가 어쩌다 그 봉지커피를 타면 맛이 그런대로 합격점이다.
그 봉지커피는 물을 끓인 뒤 조금 있다가 , 설탕부분을 삼분의 일 쯤 버리고, 물 넣은 잔에 쏟은 뒤, 충분히 잘 저어서 커피와 크림이 엉기지 않고 완전히 풀리고 나서, 입술이 데이지 않을 만큼 뜨거울 때 마시면 내 입맛에 딱 맞게 된다.
그 경우 잔을 들어 햇빛에 비추면 커피 잔 위에 아주 작은 입자의 커피기름이 일정하게 떠있다.
인스턴트커피의 경우도 그러할진대 원두커피를 막 마실 수 있을까?
커피 맛을 조금 아는 내가 보기에도 원두커피를 유리병, 알루미늄캔, 밀봉종이컵 등에 넣어 파는 건 커피모독이다.
원두커피를 공장에서 일정한 맛으로 대량생산하여 냉장고, 온장고에 진열하여 파는 건 원두 맛 조금 나는 커피를 편하게 먹으라는 이야기가 아닐까?
그 건 커피를 즐기는 게 아니라 입에 그냥 멋대가리 없이 부으라는 이야기나 다름없다.
요새 아침 마다 커피를 내린다.
아주 오래 전에 쓰던 전기커피메이커 대신에 원두를 손으로 갈아서 여과시켜 내려 먹는 방식을 좋아한다.
갓 볶은 좋은 원두를 조금씩 마련해서 쓰는데도 내 기분에 따라서 맛이 틀려지게 만들어진다.
그래도 내가 내린 커피는 그럴 때마다 맛을 다르게 음미하며 마시는 묘미가 있다. 맛이 없어 쏟아 버릴 때는 없다. 그럴 정도로 맛을 못내는 때는 커피를 내리지 않기 때문이다.
녹차를 아주 즐기지만 녹차향이 온 집안을 떠도는 걸 느끼지는 못한다.
따뜻한 물로 피어오르는 녹차 향을 눈을 감고 코를 살짝 대어가며 살살 들이키며 어찌 보면 머리로 녹차 향을 맡는 데 비해 커피는 그 향이 아주 역동적이다.
주방에서 거실로, 방으로 강하게 번지며 향을 풍긴다. 밖에서 집안으로 들어오는 사람을 현관문을 열자마자 코를 벌름거리게 만드는 향이다.
육십 중반을 넘어 이젠 고리타분한 냄새가 조금 풍겨도 흠이 아닐 나이가 되었지만, 그러한 노인네 냄새를 살짝 가려주게 만드는 향이 원두커피 내릴 때 풍기는 맛있고 상큼한 향이랄까?
산중 텃밭에서 마시는 녹차의 풍취에는 아직 따르지를 못하는 커피의 맛이지만, 커피는 확실히 녹차와는 다른 활발한 느낌의 맛을 발휘한다고 생각한다.
특히 손님들이 여럿 왔을 때 차분한 녹차보다는 역동적인 커피가 어울린다.
많이 떠들어대며, 웃고, 박수치며 들뜬 분위기를 원할 때에는 녹차는 서재책상 위에서 꼼짝 못하고 밖으로 나오질 못한다.
커피원두를 듬뿍 넣고 신나게 분쇄기를 손으로 돌려가며 갈아대고, 여과지에 부은 다음에 거품이 멋들어지게 일어나는 수증기 모양에서 나오는 풍부한 커피향으로 손님들의 후각을 자극하고, 구수한 맛으로 손님들의 입술을 가볍게 만들면 내 임무는 완료된다.
뒤늦은 나이에 커피의 맛과 향을 즐기는 취미가 다시금 살아나 참 다행이다.
은퇴 이후에 마땅한 취미꺼리가 없어 술을 따라 장소와 사람을 찾아다니는 분주함 같은 것을 거리 두고 집에서 식구들과 함께, 우리 집 찾아오는 손님들과 함께, 어떨 때는 나 혼자서 커피를 즐기는 시간을 추가로 갖는 것도 여러 가지 면에서 좋은 거 아닐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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