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날 차례

2016. 2. 8. 23:21마음, 그리고 생각

 내가 장손이 아니면서도 차례와 제사를 지낸지는 이십 년이 넘는다.

큰집의 사촌형이 제사를 지내지 않고, 작은집인 우리 집의 형님이 만 사십도 못 사시고 아주 오래 전에 돌아가셨기 때문에 차례와 제사가 이어지지를 못했고 오랫동안 양반집 노릇을 못해왔었다.

 

 내가 1995년도에 한미은행 인천지점장으로 부임한 후에 배다리시장을 구경하다가 무슨 생각에 그리 꽂혔는지 아내의 동의도 얻지 않고 남원제기와 제기를 담는 뒤주를 사들였고, 즉흥적이라고도 할 남편의 행동을 기분좋게 보아준 아내의 노력이 더하여져서 첫 제사로 한국동란 때 인민군에 학살당한 얼굴도 기억나지 않은 아버님 기제사를 지냈었다.

 그때에 어머님이 참으로 기뻐하며 눈물 흘리시는 모습을 보고는 나는 아내와 함께 기운이 빠져 기동을 제대로 못할 때까지 제사와 차례를 빼먹지 않겠다고  결심을 하였었다.

아내가 나의 마음을 알아주고, 아내의 마음 또한 나와 같은지라 그때 이후로 부모님의 기제사와  설날, 추석명절 차례를 한 번도 빼먹지 않고 지내왔다.

 오늘도 아내와 나, 그리고 자식들이 정성을 들여 만든 음식을 차려 우리 형편에 맞는 번듯한 차례상을 차렸다.

 

 

 나의 증조부님과 조부님이 한일합방 후 친일파세력에 의해 암살당하였고,

아버님 또한 6.25사변 중에 괴뢰군에게피살당하였다.

 한산이씨 인재공파 집안의 당당한 후손임에도 웃기는 이야기로 제기 하나, 땅 한 평 입에 못 물지 못하고 어렵게 인생살이를 한 것이라고나 할까

 지금 그러한 어려움과 집안의 굴곡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는 일이라 하겠으나, 장손이 아니면서 조부님 이상은 아니라도 부모님 기제사와 명절에 선조 어르신들에게 차례를 지내며 어려움을 겪었던 우리 작은집의 화평과 단합을 도모하는 의미를 더하는 제사와 차례를 주관하고 있으니 그나마 나름대로 사대부집안의 구색을 이어가고 있다는 자부심은 가질 만 하지 않은가하고 스스로 생각을 한다.

 그리고 그러한 나의 집안의 의미와 뿌리를 유지하는 데 헌신적인 역할을 하여온 아내가 언제나 예쁘고 고마울 따름이다.

 

 오늘도 어김없이 병신년 설 차례를 지냈다.

오늘은 다섯 달 갓 넘은 손자 녀석이 함박웃음으로 집안의 관심을 끌며 중심이 되어 모두들에게 기쁨을 선사하였다.

옹알이를 시작한 갓난아기가 집안에 활기를 불어 넣었다.

런 맛에 차례와 제사를 지내는 또 다른 의미가 더해지는 것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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