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날 단상

2022. 2. 1. 12:54마음, 그리고 생각

예전 기억으로 열 살 못 미친 나이에는 우리집 형편이 아주 안 좋았지만 그래도 설날이 즐거웠다.

6.25사변 전에 부르주아 급이었던 아버지는 내가 첫돌 좀 지나 공산괴뢰에 의하여 주살되었다.

풍비박산 된 집안의 천방지축어린막내인 나는 고생이란 걸 몰랐기에 설날에 외할아버지의 동생인 둘째외할아버지 집이나 큰아버지집을 찾아서 받는 세뱃돈 몇 푼에 장난감이나 만화책을 사겠다는 마음으로 마냥 즐겁기만 했었다.

그러나 나이 좀 들어 열 살이 넘어서는 나는 왜 아버지가 없을까, 우리 집은 왜 가난하고 어머니는 그리 힘들게 고생을 할까, 둘째외할아버지는 읍내의 최고인 엄청난 부자인데 왜 그리 인간 같지 않게 인색할까 등을 생각하였다.

그리고 중학생이 되고 나서는 오늘 같은 까치설날에도 내일인 설날이 기다려지지 않았고, 못 사는 집안형편으로 인한 상념에 젖는 나이로 고등학생이 되고나서는 몇 안 되는 일가친척도 나 스스로는 찾지를 않게 되었다.

 

어렵게 고생하며 학교를 마치고 남들이 선망하는 좋은 직장에 들어가서도 빚만 가지고 결혼한 탓(?)으로 나의 생활이 풍족하지는 못한데다가, 남에게 뒤지기 싫어하고 놀기 좋아하는 못되고 부족한 심성과 꼴값으로 마음씨 착한 아내를 무척이나 힘들게 하였다.

아내가 어머니를 집에 모시고 난 사십 중반에서야 겨우 인생살이를 되돌아볼 줄 알아 내가 장손은 아니지만 집에 제기를 마련하였고, 생애 처음으로 얼굴도 떠올리지 못하는 아버지 기일에 제사를 올린 이후로 지금까지 매년 빠짐없이 부모님기제사와 명절차례를 올리며 살고 있다.

못 되고 자유분방한 남편으로 인해 고생을 많이 할 때에도 양반집안의 품위는 제대로 유지해야 한다는 마음으로 부모님기제사와 명절차례를 빠짐없이 유지해온 아내가 참으로 고마울 따름이다.

 

돈 많은 부자하고는 거리가 한참 멀지만, 나이 좀 들어 인생살이를 헛되지 않게 살려고 노력을 해온 결과인지 지금은 어느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만큼의 마음부자가 되었다고 생각하며 지낸다.

비록 값이 하찮은 싼 땅이라 하여도 넓은 텃밭에서 마음대로 뒹굴며 노년을 즐기는 삶의 가치와 텃밭자연에서의 운치를 알면서 텃밭생활을 이어가고, 함께 텃밭을 즐기지는 못해도 나의 텃밭생활을 적극 지원해주는 아내가 있기에 그 자체로도 마음부자로서 손색이 없다고 생각하며 살고 있는 것이다.

 

낼이 설이라 아내는 며칠 전부터 바쁘다.

나도 아내의 심부름을 챙기느라 덩달아 바쁘다.

그런데 그동안 차례에 참여해오던 형수님과 조카, 누님부부, 이모네가 나이 들어가며 여러 사정으로 같이 하지 못하니 지금은 설 차례를 지내는 식구들이 순전히 나의 직계로만 구성이 되어 단출해졌다.

그래서 아내와 의논하여 앞으로는 푸짐한 상차림을 고집하지 않기로 하고 차림의 가짓수와 양을 우리 사정에 맞게 줄이기로 하였다.

정화수와 촛불만으로 차림을 한다고 안 될 일도 아니니, 모이는 우리 식구들 하루 이틀 기분 좋게 알맞은 가짓수와 양으로 가볍게 배 채우고 명절을 즐기면 충분할 것이리라.

 

이제는 늙어서인가?

새해 첫날에 무엇을 어떻게 하겠다는 계획이나 각오를 새롭게 하는 일도 없어졌다.

어제는 올봄부터 텃밭에 떨어뜨릴 씨앗 몇 가지를 주문하였다.

씨앗이나 묘목을 생각하여 준비하고, 볼 책 몇 가지 가려서 찾고, 늙은이 마음 어떻게 평화롭고 순하게 다스릴 수 있을까 생각하면서 살아가면 될 일 아닐까?

되지 않을 일 욕심낼 일이 아니고, 나이에 알맞게 할 수 있는 일 찾고, 형편에 걸맞게 땀 흘리며 지내면 노년의 삶으로는 충분히 만족스런 것이 아닐까하고 생각한다.

 

코로나가 세상을 어지럽게 만들며 괴롭혀도 우리들 설날의 푸근한 마음을 어쩔 수는 없나보다.

한적했던 재래시장이 오랜만에 설 명절을 준비하는 인파로 북적인다.

어려운 형편에서도 굴하지 않는 진짜 한국인들을 바라본다.

 

(22.0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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