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설악산 대청봉을 오르다

2012. 2. 12. 23:51나들이

 대청봉을 올라 본지는 거의 십년이 되어간다.

텃밭농사 6년에 저축은행에서 2년을 보냈으니 극성맞게 등산을 다닌 지도 9년이 되어간다.

그래도 은행 퇴직 이후 지리산 종주를 두 번 하고, 틈틈이 북한산을 찾았으니 등산하고 연을 끊지는 않고 인생을 살아온 셈이다.

내 인생에서 가장 좋아하고 보람 있는 운동이자 취미가 등산이라고 여겼고,

등산의 과정을 즐기고 결과에 언제나 고마워하는 마음을 가지고 살았기에 언제나 변함없이 산에 대한 좋은 생각을 하면서 살고 있다.


 갑자기 눈 속에 묻혀있는 설악산과 얼음보석으로 싸여있는 대청봉의 나무와 돌들이 그리워졌다.

혼자 즐기기는 것보다는 직원들과 같이하면 더 좋을 것 같아 산행할 사람을 찾았으나 부장 세 명 말고는 같이 가겠다는 이들이 없다.

하긴 요새는 스키가 눈에 아른거리는 젊은이들이 대부분일 테이니

엄동설한에 대청봉에 올라 얼어 죽을 맛을 느껴보라는 것은 아무래도 무리이겠다?


 일기예보를 보니 대청봉에 오르면 좋은 일출장면을 볼 수 있겠다.

금요일 업무를 끝내고 인천을 출발 밤 열시 넘어 오색에 도착했다.

네 시간 잠을 자러 들어간 곳이 이십여 년 전 여름철 한미은행 연성소로 운영되었던 약수온천장모텔이다.

그간 한 번도 수리를 하지 않았는지 시설이 영 형편없다.

가족과 함께 여름휴가를 그 곳에서 보낼 때는 그런대로 멋졌는데 너무도 낡았다.


 알람소리에 뭘 그리 일찍 출발 하냐고 꼼지락거리다 컵라면 하나 먹고 새벽 네 시 이십 분 경에 오색을 출발했다.

야간산행 하는 단체 팀 버스가 한 대 뿐이다.

줄줄이 오르는 이가 없기에 쾌적한 산행을 하게 될 것이라 생각하니 기분이 좋았다.


 한창때는 오색에서 대청을 무거운 배낭을 메고 두 시간 반이면 올랐으니 아무리 설산이라 해도 세 시간이면 족하다싶어

일출 전 세 시간 전을 출발시각으로 잡은 것이 첫 번째 실수!

 예전에 쓰던 이태리제 고급 아이젠을 아무 생각 없이 담아온 것이 두 번째 실수!

아이젠을 착용하고 얼마 못가 고생을 하고 벗기고 다시 착용하다가 결국 이 부장이 여벌로 가지고온 간이용 아이젠을 얻어 사용을 했다.

 장거리 겨울 산행을 앞두고 일주일간 낮술과 밤술을 겹치기로 하면서 사흘을 술 마셔댄 것이 세 번째 실수!


 가파른 깔딱 고갯길이 하염없다.

장딴지와 무릎이 영 가볍지가 않다.

자꾸 일행과 쳐지니 모두들 앞서가라 했지만 오 부장이 내 뒤를 지키는 게 무척 미안스럽다.

흐르는 땀을 식히느라 겉옷을 벗으면 춥고, 모자를 벗으면 머리에 얼음이 얼어 붙고, 쉬면 쉴수록 다리가 풀려진다.

대청봉에 열여섯 번이나 오른 베테랑의 모습이 자꾸 초라해지니 내심 화가 나기도 한다.

흐르는 세월을 멈추게 하면서 언제나 청춘일 수는 없는 것이고,

육십 중반으로 달려가는 나이에 밤낮없이 마시는 술이 독이 된다는 것이 뻔한 것인데,

무리한 야간고산등반을 동네약수터뒷산 오르듯이 생각하였다는 어리석음에 또 화가 났다.


 동녘하늘이 차츰 밝아지고, 서편으로 기우는 보름지난 한 쪽이 찌그러진 달이 마지막 밝은 달빛을 맑은 하늘에 뿌려댄다.

에구! 삼십 분 먼저 출발했으면 대청봉에서 느긋하게 일출을 볼 수 있었을 텐데!

고도 1580미터 부근을 지나면서 오 부장과 둘이 동편 바다에서 막 떠오르는 붉고 밝은 광채를 넋을 놓고 바라본다.

비록 나뭇가지 사이로 보이는 것이기는 하지만 화려하고 장엄한 일출의 모습에 세찬 바람과 함께 몰아치는 살인적인 추위를 잊어본다.

수평선 위가 아닌 구름 위의 일출이라 좀 아쉬웠지만 대청봉 오르는 중에 본 횡재니 얼씨구다!

카메라를 꺼내 찍어보지만 두 컷을 찍고는 전지가 얼어붙어 작동이 되질 않아 작품을 못얻었다.

 

 

 십오 분 쯤 더 오르니 먼저 간 김 부장과 이 부장이 대청봉 아래쪽에서 발을 동동 구르며 팔을 흔들어대며 추위와 싸우고 있다.

정상에는 광풍이 몰아쳐 제대로 서서 있을 수도 없고,

죽을 것 같은 추위에 일출이고 뭐고 정신이 없어

그나마 일출을 볼 수 있으면서도 바람이 약한 곳에서 얼어죽지 않으려고 악을 쓰고 있었다는 것이다.

먼저 올라간 죄로 우리보다 더한 벌을 받았으렷다! ㅎㅎ

대청봉에 오른 이들이 우리를 포함에 일곱 명도 안 된다.

작동이 멈춘 카메라로 기념촬영도 불가능하고, 정상에서 폼 잡고 기분 낼 상황도 아니다.

코와 입이 얼어붙어 잘못하다가는 중증의 동상을 입을 것 같다.

두툼한 모장갑 안의 손가락과 두꺼운 갑피로 둘러싸인 비브람등산화 속의 발가락도 감각이 이상해지고 있었다.

일행에게 빠른 시간 내에 대청봉을 탈출하여 대청대피소로 갈 것을 이르고는 냅다 대피소로 뛰었다.

오를 땐 꼴찌하더니 탈출할 때는 일등이다!ㅎㅎ 

목을 움츠려 바람막이 깃 속으로 넣으며, 장갑으로 코와 입을 가리며,

정신없이 필사적으로 달려 대피소에 들어가니 남쪽나라 천국에 이른 기분이다.


 정신을 차리고 뜨거운 물 한 모금으로 몸을 추스르고는 희운각 대피소로 향했다.

대피소 안에서 요기를 하려는데 운 좋게 내 나이 또래의 솔로 등반객이 따뜻한 당귀차를 한 잔 권한다.

온 몸이 사르르 풀어지는 느낌으로 잠시 추위를 잊어보았다.

김밥은 땡땡 얼어붙어 먹질 못하고 양갱 하나 입에 넣고 초콜릿 몇 개로 허기를 채우고 다시 하산 길로 나섰다.

 

같이 오른 세 부장들, 나도 한 컷 하고 싶었지만 바로 카메라가 얼어 찍지 못했다.

 

 

 가파른 눈길에 앉아 미끄럼을 신나게 타다가 왼쪽 무릎을 삐끗했다.

경사진 외길에 남겨진 발자국을 맞추어 걸으면 통증이 심해지니 수시로 고생이다.

암튼 이 번 등산길엔 마가 씌었는지 정말 개고생이다!

그래도 천불동계곡을 장식하고 있는 웅장하고 화려한 나무, 눈, 바위, 하늘이 마냥 눈을 즐겁게 만드니

개고생이 바로 극락이나 다름없다.

추위와 땀, 그리고 고통이 없으면 지금 나를 둘러싼 설악의 장엄함과 화려함과 보는 즐거움이 없을 것이다.

보라 저 표현할 수 없는 색색으로 장식된 순수한 하늘!

오염된 하늘아래의 도시에서 바쁘고, 치밀하고, 정신없이 달리고, 계산하는 상태에서

저렇게 맑고, 깨끗하고, 장엄하고, 느긋하고, 시원한 풍경을 어떻게 얻을 수 있겠는가!

산에 오르면 온몸의 노폐물과 함께 머리와 가슴에 담겨진 지저분함이 모두 없어지는 이치를

산을 좋아하지 않는 이들이 어찌 이해할 줄 알겠는가?

아픈 다리를 달래다가는 잠시 두 손을 올려 눈이 시리도록 시원한 하늘을 휘저으며 만져본다.

 

난간 통로에 쌓여 굳어진 눈길

 

 

 

가운데 보이는 바위산이 울산바위

양폭대피소 옆 계곡. 물구멍이 아래 위 둘이어야 물이 얼지않아 물을 떠낼 수 있다.

 

 

 

 


 비선대에 이르니 무릎의 통증이 사라졌다.

다시 울산바위를 향해도 좋을 듯한 느낌이다.

비선대부터는 산길이 평지인지라 가볍게 산행을 하는 이들로 넘친다.

고되었던 아홉 시간 반의 산행길이 끝나서인가 오색을 향하는 차에서 잠시 자는 맛이 꿀맛같이 좋았다.

인제를 들러 예전의 추억어린 맛좋은 막국수집을 찾았다.

집은 그대로인데 맛은 예전과 달라 아쉬웠지만 배 고품이 맛난 반찬인지라 한 그릇 다 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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