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밭의 뜰(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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텃밭의 명당
내 나름대로 설정한 텃밭의 명당 중 하나인 연못가 돌 자리에 떡하니 한 녀석이 올라갔다. 그 돌 자리는 홀로 앉아 명상을 즐기거나, 둘이 올라앉아 차나 막걸리를 마시며 한담을 나누기에도 알맞은 자리이다. 네그루의 소나무 아래에 놓여있어 그늘져서 좋고, 연못의 노랑어리연과 텃밭 동쪽의 짙푸르게 우거진 나무숲을 바라보기에 기막히게 좋은 자리이다.지금 그 자리를 돌발주인의 허락도 없이 올라가 속세를 떠난 평화로움을 만끽하는 녀석은 돌밭 아랫집의 고양이다. 여름으로 들어가기 시작하니 부뚜막을 찾지 않고 시원한 돌 자리를 찾는가보다. 돌밭주인이 비워둔 자리를 잠시 탐하며 앉았기로 손해 보는 것 아니고 고양이에게 보시하는 기분이 들어 고양이 마음대로 즐기게 하였다.
2023.05.29 -
오미자꽃향기
개수대 옆에 자리한 오미자가 파이프터널 한쪽을 완전히 덮고 흐드러지게 꽃을 피웠다. 엊그제 농막과 비닐하우스를 오갈 때 내 코엔 아주 멋들어지게 상큼한 향내가 이따금 스쳐갔다. 웬 향인가하고 꽃을 코에 대고 냄새를 맡아보았지만 바로 느껴지지 않는다. 다시 호흡을 가다듬고 눈을 감고 살며시 맡아보니 바로 그 향이다. 내 코에는 난향, 아니 보춘화 잔뜩 피어있는 안면도 야산을 걸을 때 봄바람에 실려 오는 춘란 향과 같은 미미하면서도 때로는 존재감을 세게 나타내는 향이랄까? 올해는 지난해보다 네댓 배는 꽃이 많이 피었고, 거름도 충분히 주었으니 낙과되는 일 없이 빨간 오미자가 알알이 주렁주렁 달릴 것이다. 텃밭작물들이 생각대로 잘 되는 건 아니라도 오미자가 자라고 모양 잡는 걸 보아서는 좀 욕심을 내도되겠지!..
2023.05.11 -
농막 빗소리
이십 년전에 산골에 밭을 장만을 하고 농막에서 잠을 잤을 때에는 아주 묘한 기분을 느꼈었다. 한여름을 달구던 뜨거웠던 해가 용두산을 넘어가면 곧바로 어두워져서 송학산 위에서 내려 부는 서늘한 찬바람이 농막을 뒤덮어 긴팔 덧옷을 찾았었다. 산 아래 마을에 집들이 몇 있었지만 농막창에서 바라볼때 보이는 집은 두 채 였었고, 그나마 해지고 한 시간 지나면 바로 소등하여 농막은 그야말로 적막강산 속으로 빠져들었다. 서둘러 농막에 전기를 끌어들여 밤중의 깜깜함을 면하게 되었지만, 오밤중에 농막 홀로 불을 켜고 있을 때에는 사방의 어둠이 농막에 갇혀있는 나를 노려보는 기분이 들어 이따금 머리털이 고추서는 기분이었다. 게다가 칠흑속에서 소나기가 컨테이너농막지붕에 내려 퍼부을 경우엔 잠을 자다가도 요란스러운 굉음에 놀..
2023.04.22 -
고라니 집
텃밭 북쪽으로는 송학산을 둘러친 튼튼한 철조망이 있다. 멧돼지가 내려와서 전염병이 번지지 못하게 제천시에서 설치한 이후로 멧돼지의 피해는 완전히 없어졌다. 그에 따라 고라니의 출현도 한동안 없더니 올해부턴 텃밭작물을 이따금 잘라먹어 텃밭주인의 화를 돋우기도 한다. 철조망설치 후엔 고라니가 송학산에서 내려오는 게 아니니 아래 쪽 야산이나 풀밭에서 올라오는 것이 분명하다. 들깨밭과 매실밭 사이에 오십여 평의 풀밭이 있다. 들깨밭으로 늘려갈 공간이지만 게으름으로 그대로 두 해를 놔두었더니 억새밭이 되었다. 오늘 아침에 밭을 돌아다니다 억새풀들이 눕혀진 곳을 보니 바로 고라니 집이 하나 보인다. 고라니 집은 아주 엉성해서 은폐장소로의 역할만하면 되고, 흙 위의 풀들을 둥글게 눕히면 그만이다. 방어는 풀들의 은폐..
2022.11.05 -
시월말 텃밭풍경
낼이면 11월이다. 가을 색으로 물든 텃밭주변이 내 보기에 참 좋다. 단풍색은 화려하지 않지만 겨울을 대비하는 자연스러움이 가득하고 잔잔한 느낌을 주는 가을색이다. 송학산줄기 아래의 텃밭이라 산중의 깊이를 느끼는 맛도 있어 낙엽을 떨구기 전에 자주 텃밭주변을 돌아다니며 가을 맛을 눈 속에 넣기가 바쁘다. 마늘을 심은 밭에는 수확 후 색 바랜 땅콩과 고구마의 줄기와 잎의 잔해로 덮어주고, 자색양파를 정식한 밭에는 들깨를 털어내고 남은 잎과 들깨깍지를 뿌려주었다. 얼음이 얼기 전에 그 위에 비닐을 덮어 보온을 할 것이다. 배추는 고라니 습격 이후에 망을 덮어 보호하여 탈이 없지만 성장모양이 아주 우습다. 무는 동치미용 종자로 심었는데 겨우 총각무보다 좀 커 철활대를 박아놓고 보온비닐을 씌워 열흘 정도 더 키..
2022.11.05 -
참취꽃
작년 초봄 텃밭 연못가 소나무 아래쪽에 나물로 먹을 참취를 이십여 분 심었는데 봄철 이후로 입맛을 돋우는 본분을 충실히 이행하고 나서는 한창 더운 8월 중순부터 지금까지 한 달반이 넘도록 눈길을 끄는 흰 꽃을 줄기차게 피우고 있다. 텃밭의 유별난 존재로서 자리를 화끈하게 잡은 참취가 기특하다. 봄철에 산뜻한 기운이 묻어나는 취나물을 주는 것만 해도 고마운데 텃밭 양지쪽의 쑥부쟁이무리와 경쟁하듯 연못가 소나무 아래에 커다란 무리를 만들어가며 가을 냄새를 풍겨주니 예쁜 놈으로서 텃밭주인이 좋아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특별히 보살펴 줄 필요도 없으니 굳센 야생화의 기개를 유감없이 발휘하면서 텃밭의 가을 주인공으로 자리를 잡기를 바라고 있다. 매일 아침 일찍 찾아가 눈길을 주는 가을 맛이 쏠쏠하다. (22...
2022.10.12